문득 내 발 아래에 놓인, <송곳> 한 더미
- 최규석의 만화 <송곳>을 읽다
글이 담을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가 늘어가고 있다. 어느덧 이 세상은 예술 작품을 넘어 매체와 언론의 영역에까지 글자를 넘어선 표현 방식을 요구한다. 글이 가지는 힘을 굳게 믿는 이들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와 같은 비판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이는 형식을 불문하고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이제부터 소개하고 싶은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은 정말이지 훌륭한 문학 작품이다. 어쭙잖은 소재를 팔아먹거나 과거의 영광에 묻혀 상상력의 주름을 잡으려는 일부 소설가들의 문장은 한없이 가볍다. 그러나 최규석 작가는 그런 이들이 쉽사리 무시하는 만화라는 컬트 문화적 표현 방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독자의 머릿속에 메다꽂는다.
열혈 독자들의 호응 하에 8월부터 시즌 4를 연재하고 있는 네이버 웹툰 <송곳>은 웹툰이란 세계에서 보기 드문 극화체 흑백 만화를 고집한다. 나아가 주제는 무겁기 짝이 없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다루고 있는 이 만화를 읽다 보면 마치 일간지 신문 사회면에서 접할 수 있는 뉴스 한 꼭지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웹툰 <송곳>은 이야기로서의 각색을 거쳤지만 스토리의 상당 부분은 2007년 까르푸-이랜드 비정규직 해고와 그 투쟁 과정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송곳>은 외국계 대형 마트 ‘푸르미’에서 벌어지는 부당해고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의 싸움과 그 과정을 다룬다. 푸르미의 관리직인 주인공 이수인은 군대 장교 출신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보단 도피를 택한 남자였다. 그러나 민간 사회의 직장생활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부정의와 폭력에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워하던 이수인에게, 냉철한 조직가이자 노무사인 구고신이 다가온다. 구고신을 만난 이수인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부당해고 지시에 맞서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말하자면 웹툰 <송곳>의 전반적인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제목이 참 적절하다. 송곳이라니. 단 두 음절의 단어는 이수인을 포함한 주인공의 행보를 효과적으로 압축해 담는 동시에 이 만화를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일침이기도 하다. 실제로 <송곳>은 우리가 평소 잊고 지내왔던 이야기 - 노동과 노동권 등 - 를 현실 그 자체로 풀어내는 작품이기에, 독자들은 까슬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이 불편한 감정은 현실을 인지함으로써 파생된다. 비유하자면 못으로 뒤덮인 바닥을 걸어 다니며 살던 사람이 문득 그곳이 '못'임을 인지하고 불현듯 느끼는 고통의 감정에 가깝다.
작중 세계에서 푸르미 노동조합은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투쟁하며 자신의 삶 자체를 담보 잡힌다. 그러나 이들의 간절함과 상관없이, 불행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다. 작중 이수인을 포함한 노조원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작품을 떠나 현실을 바라보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작중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최고급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쪽방촌이 늘어서 있는 강남의 사진 한 장에 분노하지만,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의 생활을 영위한다. 사실, 나의 생활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면 나를 넘어선 계급과 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문제에 뛰어들지 않는다. 아니, 뛰어들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건 우리 개인의 윤리의식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다. 급속도로 만들어진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정도의 깊은 상호 이해가 전제되는 성숙한 자본주의를 기대한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이미 경쟁과 약육강식의 도태를 일상의 당연함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느덧 10대의 치열한 대입경쟁과 취업 준비생의 스팩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왜‘라는 물음을 던지기보단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그러나 경쟁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운 없는’ 사람들은 나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사회의 희생양이 된 이 사람들은 그때야 세상의 문제와 직면하고, 모난 돌이 되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송곳처럼 말이다.
웹툰의 한 줄 소개 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어쨌건 나는 세상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 일차적으로 걸림돌은 주인공 이수인을 의미하지만, 나아가 작가가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작가가 바라는 형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얼리즘을 고집하는 최규석 작가는 걸림돌의 밝은 면만을 그려내진 않는다. 그는 ‘용기 있어 보이는 우리 시대 히어로‘들이 그 선택을 짊어짐으로써 겪어야 하는 희생과 고통, 죽음과 외면이라는 음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한다. 현실에는 유토피아적인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히어로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이 웹툰은 불편하다.
최근 시즌4로 돌아온 <송곳>은 이제 막 날개를 펼친 상태이다. JTBC가 판권을 가져간 TV 드라마 준비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자니, 앞으로 이 작품이 나아갈 승승장구의 길이 눈에 보여 뿌듯하다. 그러나 성공의 속도와 비례하듯, 웹툰 <송곳>의 날은 날이 갈수록 더욱 뾰족해지고 있다. 특히 작가의 탁월한 대사 선출 능력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백미 중 하나이다. 앞으로 최규석 작가의 송곳은 이 사회를, 그리고 사람들을 얼마나 더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난 당분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 작품을 스스로 클릭하는 자학적인 행동을 계속할 성싶다. 그의 작품을 통해 소시민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나는 조용히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강민경 (경영학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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