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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두리> 과월호 다시보기/11호 - 2016년 5월

[밥상으로 맛보는 이슈] 내 밥상이 나를 보여주나?



Ⓒ 중앙일보 15 10 28

[젊어진 수요일]농담인데 불편하네 '수저계급론'


오늘도 하루에 삼시 세끼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감사한다. 정신없이 삶에 치이다 보면 밥을 거르는 것은 예삿일이다. 입에 음식을 넣고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그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움인지도 모르겠다. 공복의 속쓰림은 확실히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것 같다. 먹는 것의 즐거움은 하지만 동시에 괴로움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그 약간의 고통이랄까. 하지만, 즐거운 고통이니 그 괴로움은 은근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학생들이 모두 식사 시간의 즐거움만을 만끽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다 얼마 전에 밥이 목에 콱 걸리는 얘기를 들었다. 평소 점심시간에 어디서 밥을 먹느냐기에 학관 지하 카페테리아에서 먹는다고 했다. 친구 왈, “너 거지샘에 가냐?” 



거지샘? 거지라는 말 속뜻에서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어떻게 딱 단정해서 어떻다 이야기하기는 어려워도 대충 거지샘이라는 말의 뜻은 짐작은 갔다. ‘맛이 없어서 그러나?’, ‘밥을 먹고 돌아서면 또 배고프다고 그래서 그러나?’ 카페테리아에 대한 여러 악평을 종합해봤을 때, 이러한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아온 지난 20여 년간의 경험상, 내게 기분 나쁘게 들리는 말은 나쁜 말이었다. 친구가 마치 나에게 직접 ‘거지’라고 말한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그 이후,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고 있노라면 누군가 계속 옆에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거지, 거지, 거지, 거지…


니가 뭔데... 


수저 계급론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수저 계급론 따위로 우리 공동체를 죽죽 긋는 못된 이들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수저 계급론은 절실히 느낀다. 다만, 그 수저가 점점 내 이름표처럼 따라다닌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자기 검열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흙수저라고 볼지 몰라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금수저라고 욕할지 몰라 하며 두려워하는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체득해버린 제2의 본성처럼 말이다. 내 주변의 많은 것들이 수저 계급론에 따라서 재편성되고 새로이 줄서기를 했다. 너는 플라스틱, 너는 동, 너는 금, 너는 흙. 이 것을 하고 있는 너도, 그리고 이것밖에 할 수 없는 너도 플라스틱, 동, 금, 흙. 


내가 저 수저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내가 저기에 못 꼈다는 두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아찔한 줄타기를 한다. 저기 금수저 집단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저기 흙수저 집단으론 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막연한 동경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긴다. “저 사람들은 멋있다.”와 “저들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밥상... 너마저?


무얼 하고 살아가는 지가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물론 무얼 먹고 살아가는지도 그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무얼 먹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타인의 평가 지침이 아니다. 내가 이런 밥상을 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어머, 또 저런 걸 먹네?’ 하면서 비판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밥상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강요일 수도 있다. 노량진 컵밥 먹는다고 혹은 학식 중에 가장 싼 학식을 찾아 먹는다 하더라도, 돈이 궁해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얼마짜리 밥상으로 평가되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군가는 내가 방금 먹은 밥상으로 나를 라벨링 했을 것이 아닌가. “쟤는 3,500원짜리 밥만 먹더라.”


그렇다고 나보다 비싼 학식을 먹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학식을 먹을 수도 있지.’ 가격이 조금 높은 만큼 맛도 있고 양도 푸짐하다. 가끔은 나도 고를샘에 가서 파스타를 먹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다른 곳은 별로여서 그냥 고를샘만 간다.”라는 친구한테 “아, 정말 너는 돈이 많구나”하진 않는다. 그런데 왜, 싼 학식에 대해서는 이유를 부여하는 것일까. 왜 싼 학식이라고 무시하는 것일까. 고를샘 파스타를 먹는다고 부르주아라고 하지 않듯이 카페테리아 학식을 먹는다고 거지는 아니지 않은가. 


제일 우스운 것은 거지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나 자신이 거지인가 계속 두려워하고 고민한다는 점이다. 철저히 자기 검열하고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나 공포에 떠는 이 처량한 모습이 가엾기까지 하다. 처음 수저 담론이 등장했을 때, 들었던 기분과는 사뭇 다르다. ‘아, 나는 흙수저네!’ 하면서 자조하며 웃었던 과거와는 달리, 누가 날 흙수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두려움에 떤다. 철저한 자기 검열의 시대인가보다. 


왜…? 도대체 왜…?


차별은 끊임없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평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도 결국은 불평등하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애초에 불평등했다. 수저 담론도 이러한 관점에서 나왔을 것이다. 인간은 불평등한데, 평등하다고 자꾸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잘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조가 수저 담론과 수저 딱지를 이곳저곳에 적용하고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최근 보이는 온갖 것에 대한 ‘수저 딱지’는 자조라고 보기는 어렵기도 하다. 새로운 줄 세우기의 수단으로 수저 담론이 쓰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은’수저이고, 그래도 ‘동’수저들 보다는 낫다. 나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깔보고 그 수저 계급론 속에 포함시키면서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마녀사냥이 아닐까. 끝없이 과열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수저를 기준으로 서로 수준 이하로 규정하고 깎아내리는 현실은 어쩌면 처절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의 몸부림이 아닌가. ‘날 사랑해줘요, 날 바라봐줘요. 저들보다 내가 더 가치 있고 사랑할 만 하답니다.’ 하는 그런. 나 역시 사랑받고 싶다. 누군들 사랑받는 것을 싫어하겠냐마는 남을 밟고 도약하는 그런 사랑은 별로 아름답지 못할 것만 같다. 


밥을 씹는 입안이 깔깔하다. 오늘따라 입맛도 별로 없다. 먹는 일마저 남의 눈치를 보는 이 신세라니. 슬프다. 


이종현 기자 green198800@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