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트위터 등지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자취 경험담’을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올리기 시작했다. 발단은 2015년 출간된 <자취방>이라는 사진집이 여성혐오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 사진집은 자취하는 여성들을 주로 담았다. 문제가 된 부분은 사진집 속 자취하는 여성들이 흔한 성인 화보 속 여성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작은 집에서 치마를 들치고 이불에 누워 있거나, 속옷을 드러내고 세탁기에 들어가 있는 등, 자취하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사진집에 대한 지적을 시작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여성들의 자취 경험담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범죄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배달음식을 몇 번 시켜먹었다가 배달원들 사이에 혼자 사는 여성이라고 소문이 나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한밤중에 낯선 이가 한참 문손잡이를 돌리다가 갔다거나, 집에 들어가는데 성기를 노출한 남성이 쫓아오더니 문을 잡고 버텨서 경찰에 신고했다는 등, 여성들은 그동안 쉽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트위터를 통해 쏟아냈다.
이처럼,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여성혐오 경험’을 털어놓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개인의 폭로가 큰 사회 운동의 발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고발의 목소리’에 대해 알아보고, 이러한 경험 공유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알아본다.
익명의 목소리, 여혐별곡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여혐별곡 대나무숲’은 시작된 지 몇 달도 되지 않았으나 벌써 450개가 넘는 제보를 게시했다. ‘대한민국의 여성혐오에 관한 제보를 받습니다’라는 공지 그대로, 다양한 종류의 여성혐오에 대한 제보가 매일 올라오고 있다. 제보의 내용은 다양하다. 성폭력, 지인의 여성혐오 발언, 대중문화 속 여성혐오 등 제보자들이 실제로 겪었거나, 들었거나, 목격한 일들이다. 글마다 댓글을 통해 공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많다.
‘여혐별곡 대나무숲’은 타 대나무숲이 그렇듯이 여러 명의 관리자가 운영하고 있다. 페이지 설립자는 다른 페미니즘 페이지를 운영하던 중, 여성혐오 관련 제보를 많이 받아 그런 제보 글을 따로 모으는 곳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대나무숲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관리자들은 여혐별곡 대나무숲의 존재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면서 여성혐오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이를 공감할 기회를 주고, 직접 경험해본 사람에게는 자신의 경험이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깨닫게 해 주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기 같은 여성혐오를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부터가 해결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발, 그리고 문단 내 성폭력 방지 운동
이렇듯 여성혐오에 대한 고발은 여러 의미가 있다. 익명 고발이 큰 사회 운동과 대책 마련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2016년 10월, 트위터에서 ‘고발자5’라는 계정이 2013년까지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로 재직했던 배용제 시인의 성폭행을 고발했다. 이후 ‘생존자C’라는 계정은 같은 학교에 재직했던 다른 문인의 성폭력을, ‘HateB’라는 계정은 배용제 씨의 금품 갈취를 폭로했다.
뒤이어,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에서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는 가해자 처벌, 고양예고의 재발 방지 대책, 문단 내 자정 노력을 요구했다. 이후 고양예고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한국 작가회의가 문단 내 성폭력 징계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작지만 조금씩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2월 22일에는 배 씨가 성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탈선’은 페미니즘 및 퀴어 문학 잡지 ‘소녀문학’과 연대해 좌담회를 열어 한국 문단과 예술고등학교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출판사 ‘봄알람’에서는 146명의 여성 작가들이 참여한 문집 <참고문헌 없음>의 크라우드 펀딩을 2월 22일 현재 진행하고 있다. 이 문집의 수익은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문단 내 성폭력의 책임을 묻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탈선'의 페이스북 페이지
◀<참고문헌 없음>의 소개 광고
문제 제기를 넘어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임수영(독어독문학·15) 씨는 SNS를 통해 여성 혐오에 대한 익명의 고발이 이어지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5년에 제가 페미니즘을 얕게나마 배울 기회가 있었을 때,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은 전문적이고 마이너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SNS라는 접근 용이한 공론장에서 더 자주 다뤄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온라인 공간에서 자극적인 말이 이어지면서 여성혐오에 대한 고발이 ‘남녀 간의 감정싸움’으로만 끝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싸움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남학생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이버 공간의 특성상 원색적 비난으로 번지기도 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여혐별곡 대나무숲’의 관리자들은 여성혐오를 개선하기 위해 기득권층의 근본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의 경우, 여성의 호소를 단순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임을 인정하는 것이 옳은 태도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분쟁을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여성혐오에 대한 고발은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이는 문제 해결의 첫걸음일 뿐이다. 계속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익명의 고발자가 혼자 싸우지 않도록 연대하고, 함께 해결책을 논의하고, 목소리를 모아 전달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개선을 요구하는 등의 일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노한 여성들이 연대하여 실질적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거듭했기 때문에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은 트위터 내 논란으로만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고발은 불씨가 된다. 불씨가 거센 불길이 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SNS는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숨길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찾아 주었다. 단순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과 연대가 이어질 때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글,디자인/이린 기자
springoflif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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